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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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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랭크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이자 감독으로, 1935년에 태어나 2019년에 사망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양대 리그에서 MVP를 수상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1966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타격 삼관왕을 달성하고 월드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으며, 21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58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볼티모어 오리올스, 몬트리올 엑스포스/워싱턴 내셔널스 등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며,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또한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는 등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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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빈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1년 신시내티 레즈의 로빈슨
포지션외야수 / 감독
출생일1935년 8월 31일
출생지미국 텍사스주보몬트
사망일2019년 2월 7일 (83세)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
타격우타
투구우투
데뷔 리그MLB
데뷔일1956년 4월 17일
데뷔 팀신시내티 레즈
최종 리그MLB
최종일1976년 9월 18일
최종 팀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격 기록 (MLB)
타율0.294
안타2,943
홈런586
타점1,812
감독 기록
승-패1,065–1,176
승률0.475
선수 경력
신시내티 레드렉스 / 레즈 (1956–1965)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6–197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73–197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4–1976)
감독 경력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5–1977)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1–1984)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8–1991)
몬트리올 엑스포스 / 워싱턴 내셔널스 (2002–2006)
코치 경력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77)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8–1980)
밀워키 브루어스 (1984)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5–1987)
수상 내역
올스타14회 (1956, 1957, 1959, 1959², 1961, 1961², 1962², 1965–1967, 1969–1971, 1974)
월드 시리즈 우승2회 (1966, 1970)
MVP2회 (1961, 1966)
월드 시리즈 MVP1966
트리플 크라운1966
NL 올해의 신인1956
골드 글러브상1958
AL 타격왕1966
AL 홈런왕1966
AL 타점왕1966
AL 올해의 감독1989
영구 결번
명예의 전당
명예의 전당 헌액
종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날짜1982년
득표율89.2% (첫 번째 투표)

2. 선수 경력

1961년 신시내티 레즈 시절의 로빈슨


프랭크 로빈슨은 길고 성공적인 선수 경력을 보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1956~1965)와 볼티모어 오리올스(1966~1971) 두 팀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7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73~197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74~1976)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양대 리그에서 모두 MVP를 수상한 선수로, 1961년 레즈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 MVP를, 1966년 오리올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56년 신인 시절, 로빈슨은 당시 신인 최다 홈런 타이인 38개를 기록하며[79] 올해의 신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레즈 시절인 1961년에는 팀의 내셔널 리그 우승을 이끌며 첫 MVP를 수상했고, 1962년에는 타율 .342, 39홈런, 136타점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원기 왕성한 타격과 주루 스타일로 알려져 있었다.

1966년 시즌을 앞두고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 로빈슨은 이적 첫해에 타율 .316, 49홈런, 122타점으로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다시 한번 MVP에 올랐다. 오리올스는 그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고, 로빈슨은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볼티모어 시절, 로빈슨은 시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오리올스는 로빈슨과 함께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우승을 경험했다.

로빈슨은 21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통산 타율 .294, 586홈런, 1812타점, 2943안타를 기록했다. 은퇴 당시 그의 통산 홈런 기록은 행크 에런,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에 이어 역대 4위에 해당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 역사상 장타율 1위이며, 홈런 부문에서는 조니 벤치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2. 1. 어린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1935년 8월 31일 텍사스주 보몬트에서 태어났다.[3] 그는 루스 쇼가 낳은 10명의 자녀 중 막내였으며, 아버지 프랭크 로빈슨과의 사이에서는 유일한 자녀였다.[3] 로빈슨이 아직 어렸을 때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 루스 쇼는 자녀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로 이주했다가 이후 인근 오클랜드의 웨스트 오클랜드 지역에 정착했다.[4] 그는 오클랜드의 맥클리먼즈 고등학교에 다녔으며,[4] 이곳에서 고등학교 농구 팀 동료로 훗날 NBA의 전설이 되는 빌 러셀과 함께 뛰었다.[5] 또한 야구팀에서는 바다 핀슨, 커트 플러드와 함께 선수로 활동했다.[5] 아메리칸 레지온 야구에서도 활동했다.[4]

2. 2. 마이너 리그 경력

1953년, 신시내티 레즈스카우트인 바비 매틱과 3500USD에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4] 그는 파이오니어 리그의 C 클래스 팀인 오그던 레즈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이 팀에서 7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48, 17홈런, 83 타점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었다.[6] 1954년에는 더 높은 레벨인 텍사스 리그의 툴사 오일러스로 승격되었으나, 시즌 중 다시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의 A 클래스 팀인 컬럼비아 레즈로 이동하게 되었다. 1955년 시즌도 컬럼비아 레즈에서 시작했다.[4]

2. 3. 메이저 리그 경력



프랭크 로빈슨은 길고 성공적인 선수 경력을 보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1956~1965)와 볼티모어 오리올스(1966~1971) 두 팀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7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73~197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74~1976)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양대 리그에서 모두 MVP를 수상한 선수로, 1961년 레즈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 MVP를, 1966년 오리올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56년 신인 시절, 로빈슨은 당시 신인 최다 홈런 타이인 38개를 기록하며[79] 올해의 신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기록은 훗날 코디 벨린저[80]피트 알론소[81]에 의해 경신되었다. 레즈 시절인 1961년에는 팀의 내셔널 리그 우승을 이끌며 첫 MVP를 수상했고, 1962년에는 타율 .342, 39홈런, 136타점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원기 왕성한 타격과 주루 스타일로 알려져 있었다.

1966년 시즌을 앞두고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 로빈슨은 이적 첫해에 타율 .316, 49홈런, 122타점으로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다시 한번 MVP에 올랐다. 같은 해 5월 8일에는 메모리얼 스타디움 역사상 유일하게 홈런 타구를 완전히 경기장 밖으로 넘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오리올스는 그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고, 로빈슨은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그는 다저스와의 월드 시리즈 1차전과 4차전에서 돈 드라이즈데일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4연승 우승에 기여했다.

볼티모어 시절, 로빈슨은 시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볼티모어의 인종 차별적인 주택 정책과 부동산 관행을 목격한 후 인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데 앞장섰다. 1970년에는 워싱턴 세네이터스를 상대로 연속 이닝 만루 홈런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오리올스는 로빈슨과 함께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로빈슨의 친정팀인 신시내티 레즈를 꺾고 우승했다.

로빈슨은 21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통산 타율 .294, 586홈런, 1812타점, 2943안타를 기록했다. 은퇴 당시 그의 통산 홈런 기록은 행크 에런,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에 이어 역대 4위에 해당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 역사상 장타율 1위이며, 홈런 부문에서는 조니 벤치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다저스, 에인절스, 인디언스를 거치며 활약했다.

2. 3. 1. 신시내티 레즈 (1956-1965)

(1961년)]]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프랭크 로빈슨은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금 3500USD에 계약했다. 그 해 C급 마이너 팀인 유타주 오그던의 오그던 레즈에서 7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8, 83타점을 기록했다. 1954년에는 AA급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털사 오일러스로 승격했으나, 다음 해인 1955년에는 A급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의 컬럼비아 레즈로 강등되어 시즌을 보냈다.

1956년, 로빈슨은 20세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7] 당시 11시즌 연속으로 패배하는 시즌을 보내던 레즈는 1956 시즌 중반 1위로 도약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로빈슨은 시즌 중반 18개의 홈런으로 팀을 이끌었고, 이 활약으로 1956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의 좌익수 선발로 선정되었다.[4][8] 레즈는 시즌 마지막 날까지 우승 경쟁을 벌였고, 브루클린 다저스에 2경기 뒤진 91승 63패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9] 로빈슨은 그해 타율 .290, 83타점, 그리고 당시 신인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38홈런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신인왕에 선정되었다.[7][10][11] 이 신인 홈런 기록은 1930년 월리 버거가 세운 기록과 같았으며, 1987년 마크 맥과이어가 49개의 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31년간 유지되었다.[10] 또한, 그는 신인 최다인 20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기도 했다.

1957년에 레즈는 다시 시즌 중반에 1위를 차지했고, 로빈슨과 그의 레즈 팀 동료 6명—에드 베일리, 조니 템플, 돈 호크, 거스 벨, 월리 포스트, 로이 맥밀런—이 1957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 리그 선발 라인업에 팬 투표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커미셔너 포드 C. 프리크가 시작한 조사에서 투표의 대부분이 레즈 팬들의 투표 조작 캠페인의 결과로 신시내티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12] 프릭은 로빈슨이 팀에 남는 것을 허용했지만, 벨과 포스트는 외야수 행크 에런윌리 메이스로 NL 선발 명단에서 교체되었다.[12] 벨은 예비 선수로 남았지만, 포스트는 명단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12] 그 후, 프릭은 팬들의 올스타전 투표 권한을 정지시켰고, 이는 결국 1970년에 복원되었다.[12] 레즈는 올스타전 휴식기 이후 부진했고, 시즌 최종 순위에서 4위로 떨어졌다. 로빈슨은 타율을 .322로 향상시켜 1957년 NL 타격 챔피언십에서 스탠 뮤지얼(.366)과 윌리 메이스(.333)에 이어 3위를 기록했고, 애소시에이티드 프레스 내셔널 리그 올해의 2년차 선수상을 수상했다.[13][14]

1958년에 로빈슨은 경력에서 유일한 골드 글러브상을 수상했지만, 레즈가 내셔널 리그 최하위로 떨어지면서 그의 타율은 .269로 하락했고, 버디 테벳츠 감독은 8월 14일에 사임을 발표했다.[7][15][16] 1959년에 로빈슨은 146경기에서 타율 .311, 36홈런, 125타점으로 향상되었다.[7] 그는 또한 1960년에 139경기에서 타율 .297, 31홈런, 83타점을 기록하며 생산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 해,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에서 장타율(.595)과 출루율+장타율(1.002)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또한 NL에서 몸에 맞는 볼 (9개)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7]

1961년에 로빈슨은 우익수로 이동하여 또 다른 강력한 공격 시즌을 만들어냈다.[4] 7월에는 .409의 타율, 13개의 홈런, 34타점을 기록하여 NL 이달의 선수를 수상했으며, 시즌을 .323의 타율, 37개의 홈런, 153경기에서 124타점으로 마쳐 레즈가 1961년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7][17] 그의 활약은 그에게 1961년 내셔널 리그 MVP를 안겨주었다.[18] 196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로빈슨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레즈가 5경기 만에 양키스에게 패배하면서 3개의 안타만을 기록했다.[19]

로빈슨은 1962년에 경력 최고 타율인 .342를 기록했고, 이는 NL 타격 챔피언인 토미 데이비스보다 불과 4리 뒤진 기록이었다.[20] 그는 또한 39개의 홈런, 136개의 타점(개인 최다), 51개의 2루타(리그 1위), 208개의 안타를 기록했으며, 득점 (134), 출루율 (.421), 장타율(.624) 및 출루율+장타율(1.045)에서 리그를 이끌었다.[7][20]

로빈슨은 맹렬하고 공격적인 선수로 유명했다. 그는 원기 왕성한 타격 스타일을 가졌고, 베이스러닝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1957년에는 스파이크로 조니 로건을 가격하여 로건이 6주 동안 결장하게 만들었다. 1960년 8월 15일 밀워키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로빈슨은 3루로 강하게 슬라이딩했고, 이로 인해 밀워키의 3루수 에디 매튜스와 주먹다짐을 벌였다.[21]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은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5년 12월 9일, 당시 레즈의 구단주인 빌 더위트는 로빈슨을 "30세지만 젊지 않다(not a young 30)"고 평가하며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했다. 레즈는 그 대가로 투수 밀트 파파스, 투수 잭 발드슉, 외야수 딕 심슨을 받았다.[7] 이 트레이드는 레즈에게 큰 손실로 작용하며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한 거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당시 레즈는 공격력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으나 투수진 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볼티모어에서 꾸준했던 파파스는 신시내티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로빈슨은 오리올스에서 선수 생활의 정점을 맞이하게 된다.[22]

2. 3. 2.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6-1971)

1965년 12월 9일, 신시내티 레즈 구단주 빌 더위트는 로빈슨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했다. 레즈는 그 대가로 투수 밀트 파파스, 투수 잭 발드슉, 외야수 딕 심슨을 받았다.[7] 당시 드윗은 로빈슨을 '30살이지만 젊지 않다(not a young 30)'고 언급하며[22] 트레이드를 단행했는데, 이는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한 트레이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레즈는 1965년 내셔널 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투수진 보강이 필요했고, 볼티모어에서 꾸준했던 파파스는 신시내티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22] 반면, 당시 30세였던 로빈슨은 오리올스에서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볼티모어에서의 첫 해인 1966년, 로빈슨은 타율 .316, 49홈런, 122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7] 특히 그의 타율 .316은 역대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 중 가장 낮은 기록이며, 49홈런은 우타자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 중 최다 기록이다.[7] 1966년 5월 8일, 그는 메모리얼 스타디움 역사상 유일하게 홈런 타구를 완전히 경기장 밖으로 넘긴 선수가 되었다.[23] 이 홈런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투수 루이스 티안트를 상대로 기록되었으며, 비거리는 약 164.90m에 달했다. 오리올스가 1992년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로 홈구장을 옮기기 전까지, 공이 넘어간 지점에는 "HERE"라고 적힌 깃발이 꽂혀 있었다.[24]

오리올스는 1966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로빈슨은 월드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그는 시리즈 1차전(오리올스 5-2 승)과 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은 4차전(오리올스 1-0 승)에서 각각 홈런을 기록했는데, 두 홈런 모두 다저스의 에이스 돈 드라이즈데일을 상대로 쳐낸 것이었다.[25]

볼티모어 시절 로빈슨은 시민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가 자신을 공개적인 활동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가입하려 했으나, 볼티모어 내 만연한 인종 분리 주택 정책과 차별적인 부동산 관행을 목격한 후 생각을 바꾸어 인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열정적인 연설가가 되었다.[36]

1969년 시즌부터 로빈슨은 오리올스 클럽하우스에서 '캥거루 법정'을 열어 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판사 역할을 맡아 선수들의 사소한 잘못(예: 경기 중 여성에게 말을 걸 때마다 1달러 벌금)에 벌금을 매기거나, 특정 플레이에 서툰 선수에게 우스꽝스러운 '상'을 수여했다. 예를 들어, 주루 실수를 저지른 선수에게는 낡고 냄새나는 야구 스파이크인 '존 메이슨 주루상'이 주어졌고, 수상자는 다음 법정이 열릴 때까지 이를 전시해야 했다. 동료 짐 파머는 캥거루 법정이 팀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26]

1970년 6월 26일, 로빈슨은 RFK 스타디움에서 열린 워싱턴 세네이터스와의 경기에서 5회와 6회에 걸쳐 연속 이닝 만루 홈런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오리올스는 이 경기에서 12-2로 승리했으며, 놀랍게도 두 번의 만루 홈런 상황에서 베이스에 있던 주자는 3루 데이브 맥널리, 2루 돈 버포드, 1루 폴 블레어로 모두 동일했다.[27]

오리올스는 로빈슨과 함께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레이스에서 우승했다. 1969년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로빈슨은 상대 팀 뉴욕 메츠를 향해 "메츠와 론 가스파를 데려와!"라고 도발했다가, 팀 동료 머브 레텐먼드로부터 "그의 이름은 로드야, 멍청아."라는 핀잔을 듣고 "알았어. 그럼 로드 멍청이를 데려와!"라고 응수하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남겼다.[28] 볼티모어는 1970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빈슨의 친정팀인 신시내티 레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4]

로빈슨의 볼티모어 시절은 1971년 12월 2일, 피트 리처트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면서 막을 내렸다. 오리올스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도일 알렉산더, 밥 오브라이언, 세르지오 로블레스, 로일 스틸먼 등 4명의 선수를 받았다.[29]

2. 3. 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2)

로빈슨은 1971년 12월 2일 윈터 미팅에서 피트 리처트와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했다. 다저스는 도일 알렉산더, 밥 오브라이언, 세르지오 로블레스, 로일 스틸먼을 오리올스로 보내는 트레이드였다.[29] 197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당시, 로빈슨은 파업에 반대표를 던진 30명의 다저스 선수 중 한 명이었으나, 투표 결과 발표 후에는 "저는 파업을 믿지 않아서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부결되었으니 이제 여러분 편입니다. 여러분과 함께합니다."라고 말하며 동료들과 뜻을 같이했다.[30]

1972년 시즌은 그가 1965년 신시내티 레즈 시절 이후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뛴 해였다. 그는 103경기에 출전해 타율 .251, 19홈런, 59타점, 86안타를 기록했다.[7] 당시 다저스에서 등번호 36번을 달았는데, 원래 사용하던 20번은 팀의 에이스이자 훗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돈 서튼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팀 동료였던 토미 존은 "프랭크가 1972년에 최고의 해를 보내진 못했지만, 팀에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했다.[30]

다저스에서 한 시즌을 보낸 로빈슨은 1972년 11월 28일 윈터 미팅에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빌 싱어, 바비 발렌타인, 빌리 그라바케위츠, 마이크 스트라일러와 함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보내졌고, 다저스는 앤디 메시스미스와 켄 맥멀렌을 받았다. 이 트레이드는 로빈슨이 꾸준한 출전 시간을 원했고, 다저스 단장 알 캠파니스는 젊은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려 했기 때문에 성사되었다. 또한 이 트레이드로 로빈슨은 과거 오리올스 시절 함께했던 에인절스 단장 해리 달튼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31]

2. 3. 4.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73-1974)

1973년경 로빈슨


로빈슨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의 한 시즌을 마치고, 1972년 11월 28일 윈터 미팅에서 빌 싱어, 바비 발렌타인, 빌리 그라바케위츠, 마이크 스트라일러와 함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다저스는 그 대가로 앤디 메시스미스와 켄 맥멀렌을 받았다.[31][75] 이 트레이드는 로빈슨이 정기적인 출전 시간을 요구했고, 다저스 단장 알 캠파니스는 팀의 젊은 유망주 육성을 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 트레이드를 통해 로빈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함께했던 에인절스 단장 해리 달튼과 재회하게 되었다.[31]

에인절스에서 로빈슨은 팀 역사상 최초의 지명 타자가 되었으며, 신시내티 레즈 시절 동료였던 바다 핀슨과 다시 한 팀에서 뛰게 되었다. 1973년에는 147경기에 출전했고, 1974년에는 129경기에 출전했다. 에인절스 소속으로 뛴 약 2시즌 동안 그는 총 27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59, 249안타, 50홈런, 160타점을 기록했다.[7]

1974년 9월 12일, 에인절스는 로빈슨을 켄 수아레즈, 현금, 그리고 추후 지명 선수(러스티 토레스)를 받는 조건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했다.[7]

2. 3. 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4-1976)

1974년 시즌 중반, 로빈슨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여 1976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를 거쳐 인디언스에서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3. 감독 경력

로빈슨은 선수 경력 후반에 겨울 리그에서 감독 경험을 쌓았으며, 1970년대 초반부터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기를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열망은 1974년 시즌 중반 에인절스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75년, 인디언스는 로빈슨을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감독 경력은 이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1–1984),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8–1991), 몬트리올 엑스포스/워싱턴 내셔널스 (2002–2006)로 이어졌다.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었던 그는 자이언츠 감독을 맡으며 내셔널 리그에서도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다.

1989년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몇 년간 야구계의 다른 역할을 맡았던 그는 2002년 MLB에 의해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로빈슨의 통산 감독 기록은 1065승 1176패이다.[53]

연도정규 시즌포스트시즌
경기승률최종 순위승률결과
CLE1975년1597980.497AL 동부 4위
CLE1976년1598178.509AL 동부 4위
CLE1977년572631.456해고
CLE 전체375186189.49600
SF1981년592732.458NL 서부 5위
522923.558NL 서부 3위
SF1982년1628775.537NL 서부 3위
SF1983년1627983.488NL 서부 5위
SF1984년1064264.396해고
SF 전체541264277.48800
BAL1988년15554101.348AL 동부 7위
BAL1989년1628775.537AL 동부 2위
BAL1990년1617685.472AL 동부 5위
BAL1991년371324.351해고
BAL 전체515230285.44700
MON2002년1628379.512NL 동부 2위
MON2003년1628379.512NL 동부 4위
MON2004년1626795.414NL 동부 5위
WAS2005년1628181.500NL 동부 5위
WAS2006년1627191.438NL 동부 5위
MON/ WAS 전체810385425.47500
전체[53]224110651176.47500


3. 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5-197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시절의 로빈슨 (1976년)


로빈슨은 선수 경력 후반에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감독직을 공개적으로 희망했고, 이로 인해 1974년 시즌 중반 에인절스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74년 10월 2일, 인디언스는 로빈슨을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하여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역사를 만들었다.[39] 1975년 선수 겸 감독으로서 첫 타석에 들어선 그는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에서 뉴욕 양키스의 투수 닥 메디치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에서의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 단장 필 세기는 로빈슨의 감독 결정에 자주 이의를 제기했으며, 그가 선수와 감독 역할을 병행하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로빈슨은 감독으로서 약 80경기에 출전했다). 또한 게이로드 페리와 같은 일부 선수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페리는 언론에 로빈슨의 연봉보다 1달러 더 받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디언스는 로빈슨 감독 하에서 1975년 79승 80패를 기록했고, 1976년에는 81승 78패를 기록하며 8년 만에 처음으로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1977년 시즌 초반 26승 31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자, 구단은 1977년 6월 19일 로빈슨을 해고했다.[32][40]

3. 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1-198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직 이후, 로빈슨은 1981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았다. 이로써 그는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에 이어 내셔널 리그에서도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다.[41]

1983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로빈슨


그는 1984년 시즌 도중 106경기를 치른 후 해고되었다.[4][41] 1984년 남은 시즌은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상징적으로 1USD를 받고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42]

3. 3. 볼티모어 오리올스 (1988-1991)

1985년부터 친정팀 오리올스의 프런트에 합류하여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42] 1988년 시즌 초반, 팀이 개막 후 6연패를 당하자 4월 12일 칼 립켄 시니어의 뒤를 이어 오리올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43] 당시 오리올스는 개막 21연패를 기록하는 등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54승 107패로 동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9년, 로빈슨은 팀을 성공적으로 재건하여 87승 75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동부 지구 2위로 이끌었다. 이는 이전 시즌 대비 33승이나 더 거둔 획기적인 변화였다. 지구 우승은 시즌 마지막 토론토 블루 제이스와의 3연전에서 결정될 예정이었으나, 오리올스가 첫 두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의 뛰어난 지도력은 인정받아 그 해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44] 이는 로빈슨 감독 경력에서 팀을 포스트시즌에 가장 가깝게 이끌었던 순간이었다.[44]

로빈슨은 1991년 5월까지 오리올스 감독직을 맡다가 해고되었고,[45] 이후 1995년까지 오리올스 프런트에서 단장 보좌 역할을 수행했다.

3. 4. 몬트리올 엑스포스/워싱턴 내셔널스 (2002-2006)

2002년 2월, 로빈슨은 당시 MLB가 소유하고 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46][47] 이는 그가 몇 년간 야구계의 징계 담당 이사로 활동한 후의 일이었다. 이전 5시즌 동안 부진했던 엑스포스는 로빈슨 감독 시절 2002년2003년 시즌을 각각 83승 79패의 기록으로 마쳤다. 특히 2002년에는 내셔널 리그 동부 2위를 차지하며 2001년보다 19승을 더 거두는 향상된 성적을 보였다.[36]

그러나 2004년 시즌에는 67승 95패로 부진했으며, 이는 팀이 워싱턴 D.C.로 연고지를 이전하기 전 마지막 시즌이었다.[36] 2005년 팀이 워싱턴 내셔널스로 바뀌면서 로빈슨은 초대 감독이 되었다.

2005년 6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MLB 선수 4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로빈슨은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이었던 벅 쇼월터와 함께 최악의 감독으로 꼽혔다. 2006년 8월의 유사한 설문 조사에서도 17%의 득표율(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선수들 대상으로는 37.7%)로 다시 최악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48]

2006년 4월 20일, 내셔널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10-4로 승리하면서 로빈슨은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53번째로 이정표를 달성한 감독이 되었다.[49] 그는 2시즌 전에 감독 통산 1,000패를 기록했다.[7]

2006년 5월 25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는 7회 중간에 포수 맷 르크로이를 교체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는 이닝 중간에 포지션 선수를 교체하지 않는 야구계의 불문율을 깬 행동이었다. 당시 3번째 포수였던 르크로이는 7이닝 동안 7개의 도루를 허용하고 2개의 송구 실책을 범했다. 팀은 8-5로 승리했지만, 로빈슨은 존경하는 선수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였다.[50]

2006년 9월 30일, 내셔널스 구단은 2007년 시즌 로빈슨과의 감독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구단은 구체적이지 않은 역할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프런트 오피스 직책이나 컨설턴트 역할을 원했던 로빈슨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51] 그는 2006년 10월 1일 뉴욕 메츠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6-2 패배)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경기 전 RFK 스타디움에서 팬들에게 연설하는 시간을 가졌다.[52] 로빈슨의 최종 감독 기록은 1,065승 1,176패였다. 그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고 감독 통산 1,000승 이상을 거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53]

4. 은퇴 이후

2014년의 프랭크 로빈슨


로빈슨은 1995년까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단장 보좌로 일했다.[71] 이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MLB에서 경기 운영 담당 부사장(온필드 오퍼레이션의 부회장)으로 일하며 선수 징계 및 훈련, 유니폼 정책, 경기장 구성 등 경기 관련 문제들을 담당했다.[65]

2007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ESPN의 분석가로 활동했다.[66] 같은 해 5월 20일, 워싱턴 내셔널스는 그의 전 소속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로빈슨을 기리는 행사를 열 계획이었으나, 로빈슨 본인이 이를 거절했다.[67]

2007년 로빈슨은 MLB 프런트 오피스에 다시 합류하여 여러 보직을 거쳤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야구 운영 특별 고문으로 활동했으며,[65]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당시 커미셔너였던 버드 셀리그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이후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메이저 리그 운영 수석 부사장으로 임명되었고, 2012년 6월에는 야구 개발 담당 수석 부사장이 되었다.[65] 2015년 2월, 해당 직책에서 물러나 야구 커미셔너의 수석 고문과 명예 아메리칸 리그 회장으로 임명되었다.[68]

로빈슨의 인디언스 재직 당시 등번호 '2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영구 결번으로 2017년 지정.


201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로빈슨이 팀에서 활동할 당시 사용했던 등번호 '''2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로써 로빈슨은 놀란 라이언에 이어 세 개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2019년 2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골종양(골육종)으로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76]

5. 수상 및 영예

부시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는 로빈슨


1998년 신시내티 레즈에 의해 영구 결번된 그의 등번호 20


197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의해 영구 결번된 그의 등번호 20


로빈슨은 두 번의 최우수 선수상(1961년 내셔널 리그, 1966년 아메리칸 리그)과 1966년 월드 시리즈 MVP 상 외에도, 1966년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그 해 최고의 프로 선수에게 수여되는 히콕 벨트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54][55]

1982년, 로빈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로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6] 그는 또한 브룩스 로빈슨과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 창립 위원이며, 1978년에는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2015년 5월 9일에는 "워싱턴 D.C. 야구에 대한 상당한 공헌"을 인정받아 워싱턴 내셔널스 명예의 전당 링에 헌정되었고, 2016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신시내티 레즈(1998년), 볼티모어 오리올스(1972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2017년) 세 구단은 그의 등번호 2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놀란 라이언과 함께 메이저 리그 역사상 세 개 구단에서 등번호가 영구 결번된 단 두 명뿐인 선수이다.[57]

1999년 로빈슨은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에서 22위에 올랐으며,[58]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최종 후보로도 지명되었다.[59] 2020년 스포츠 작가 조 포사나스키가 ''디 애슬레틱''에 기고한 "야구 100" 목록에서는 20위에 선정되었다.[60]

로빈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 개의 구단이 그의 동상을 건립했다.

2005년 11월 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로빈슨에게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63] 훈장 수여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프랭크 로빈슨은 완벽한 성실함과 확고한 결의로 야구 경기를 했다. 그는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에서 모두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그가 속한 팀은 리그 우승 5회, 월드 시리즈 우승 2회를 기록했다. 1975년 프랭크 로빈슨은 야구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으로서 인종 장벽을 깼으며, 이후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국은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뛰어난 업적과 스포츠에서 지속적인 인격의 모범을 보여준 프랭크 로빈슨에게 경의를 표한다.”

2007년 4월 13일, 로빈슨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제1회 재키 로빈슨 사회 공동체 인정상을 수상했다.[64]

'''프랭크 로빈슨 주요 수상 및 기록'''
부문횟수/연도
시즌 MVP2회 (1961년 NL, 1966년 AL)
월드 시리즈 최우수 선수1회 (1966년)
올스타전 MVP1회 (1971년)
타격 삼관왕 (AL)1회 (1966년)
골드글러브상 (외야수)1회 (1958년)
신인왕 (NL)1회 (1956년)
수위 타자 (AL)1회 (1966년)
홈런왕 (AL)1회 (1966년)
타점왕 (AL)1회 (1966년)
MLB 올스타전 선정14회 (1956년, 1957년, 1959년(2), 1961년(2), 1962년(2), 1965년, 1966년, 1967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4년)
출루율 리그 1위2회 (1962년, 1966년)
득점 리그 1위3회 (1956년, 1962년, 1966년)
장타율 리그 1위4회 (1960년, 1961년, 1962년, 1966년)
히콕 벨트1회 (1966년)
개막전 홈런통산 8개 (역대 공동 1위)
끝내기 안타통산 27개 (역대 1위)


6. 사회적 영향

볼티모어 시절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6] 처음에는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의 공개 활동 참여 요구에 부담을 느껴 가입을 주저했으나, 볼티모어의 주택 분리와 차별적인 부동산 관행을 직접 목격한 후 생각을 바꾸어 인종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되었다.[36][7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시절에는 팀의 주축 투수였던 게이로드 페리가 "저 흑인 감독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지 못하면 팀을 떠나겠다"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뒤 실제로 팀을 옮기는 일도 겪었다.

7. 기타

1950년대 후반 레즈 선수 시절, 오프 시즌에는 신시내티에 있는 자비에 대학교에 다녔다.[69]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에는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의 공개 활동 참여 요구에 부담을 느껴 가입을 주저했으나, 볼티모어의 주택 분리와 차별적인 부동산 관행을 직접 겪은 후 생각을 바꿔 인종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되었다.[36][77]

1961년 2월 9일, 신시내티의 한 식당에서 언쟁 중 .25구경 권총을 꺼낸 일로 체포되었다. 그는 3월 20일 은닉 무기 소지 혐의를 인정하고 250USD의 벌금을 선고받았다.[70]

1961년 바바라 앤 콜을 만나 같은 해 결혼했으며,[4]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내가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동안 함께 거주했다.[71]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57] 2003년에는 TV 시트콤 예스, 디어의 한 에피소드에 어니 뱅크스, 조니 벤치와 함께 본인 역할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72]

선수 시절 등번호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잠시 뛸 때만 36번을 달았고, 그 외 선수 및 감독 시절 내내 20번을 사용했다.

오리올스 이적 첫해인 1966년 5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당시 홈구장이었던 메모리얼 스타디움 역사상 유일한 장외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 공이 떨어진 자리에는 'HERE'라고 적힌 깃발이 오랫동안 설치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시절, 팀의 주력 투수이자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게이로드 페리와의 일화가 있다. 페리는 "저 흑인 감독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지 못하면 팀을 떠나겠다"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고, 실제로 이후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 시절에는 교체 지시에 불만을 표한 일본인 선수 오타이 유카즈에게 벌금을 부과한 적이 있다. 이후 다른 경기에서 오타이를 대주자로 기용한 것을 두고 일부 일본 언론이 '벌주(罰走, 벌로 뛰게 함)'라고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메이저 리그는 일본 프로야구 1군보다 선수 등록 인원(25명)이 적고, 무승부 없이 연장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 대기 선수가 부족하면 투수가 대주자로 나서거나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오타이가 대주자로 기용된 것은 해당 보도가 나온 경기를 포함해 이미 세 번째였으며, 오타이 본인도 훗날 인터뷰에서 "내 이야기를 직접 듣지도 않고 MLB 공식 웹사이트 등만 보고 '벌주'라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해당 보도를 부인했다.

로빈슨의 지도를 받은 또 다른 일본인 선수로는 2002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함께했던 투수 요시이 마사토가 있다. 요시이는 로빈슨 사망 후 인터뷰에서 "좋은 의미에서 올드 스쿨 감독이었다. 미국에도 이런 유형의 지도자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옛날 고등학교 야구 감독님처럼 일반 상식에도 엄격했고, 팀 규율도 매우 엄격했다. [...] 선수가 잘못된 태도를 보였을 때 단호하게 지적하는 모습은 참고가 되었다. 할 말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로빈슨 감독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하며 고인을 추모했다.[78]

2019년 2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골수암 투병 끝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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